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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특정성의 계보-1
장소 특정성은 그동안 물리 법칙에 얽매여 바닥 위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해왔다. 주로 중력의 작용을 활용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들은 한시적인 재료를 사용할지라도 ‘현전’을 고집했으며, 파괴 혹은 소멸을 목전에 두고도 부동성에 완강하게 집착했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우선 장소를 물리적 요소들-방과 벽의 길이, 깊이. 높이, 재질, 형태나 광장, 빌딩, 공원의 규모와 비례, 또는 채광, 환기, 교통 패턴의 기존 조건, 또는 특유의 지형학적 특징 등-의 독특한 조합에 의해 그 정체가 확인되는 실질적인 입지이자 유형의 현실로 간주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에 미니멀리즘을 따라 처음 출현했던 장소 특정적 작업들은 모더니스트 패러다임의 극적인 역전을 불러왔다. 그 결과, 지배적인 모더니즘의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관념적 공간은 이제 자연 풍경의 물질성이나 순수하지 않은 일상적 공간으로 급진적으로 대체되었다. 로버트 베리는 1969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선 설치 작업들이 “모두 설치 장소에 맞도록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을 부수지 않고는 옮길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리처드 세라는 워싱턴 D.C.에 있는 미 행정관리청의 ‘건축 속의 미술 프로그램’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37미터 길이의 강철 조각 <기울어진 호>는 처음부터 장소 특정적 조각으로 구상되었으며, 작품을 옮기는 것은 작품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서로 공명하지만, 로버드 베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잇따른 미학적 실험들(대지미술, 과정미술. 설치미술, 개념미술, 퍼포먼스/신체미술,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제도비판 등)의 초기단계로서, 전위적인 조각에서의 새로운 급진주의를 보여주는 반면, 리처드 세라는 공공미술의 맥락에서 볼 때 장소 특정성, 특히 작품과 그 설치 장소 사이의 물리적 분리 불가능성을 우선시하는 의미에서의 장소 특정성의 위기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미니멀리즘은 미술 오브제의 의미를 오브제 자체로부터 그것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향하게 하면서 자율적인 미술 오브제라는 관념적 신비주의에 도전했다면, 제도비판 미술과 개념미술들은 여기에 힘입어 전시 공간 자체가 지닌 관념적 신비주의를 부각시킴으로써 한걸음 더 나아갔다. 예를 들어, 갤러리/미술관 공간은 단지 기본적인 크기와 비례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제도적 위장, 곧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복무하는 규범적인 전시 관습으로 이해되었다. 즉 제도의 관념주의적 규범과 그 가치를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며’ ‘진실 된 것’이 되도록 조장하면서, 미술의 공간을 외부 세계와는 동적으로 분리시키는 약호화된 메커니즘으로 간주된 것이다. 다니엘 뷔렌은 장소는 단순히 미술관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갤러리, 미술관, 미술비평, 미술사, 미술시장 등을 포함한, 상호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일련의 공간과 경제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장소에 대해 ‘특정적’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제도적 관습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시 공간의 물리적 조건은 제도비판의 시발점이 되어 한스 하케의 <응축 큐브>(1963-1965), 멜 보흐너의 <측정>(1969)연작, 로렌스 뷔너의 벽을 잘라낸 작업들(1968), 다니엘 뷔렌의 <틀 안, 그리고 그 틀을 넘어서>(1973)와 같은 작업으로 제도가 감추려 하는 측면들을 노출하여 ‘거대한 이슈’를 남겼다. 제도적인 틀을 비판하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은 밀 래더맨 유켈레스가 1973년에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 시의 와즈워스 아테니움에서 실행했던 일련의 ‘메인터넌스 아트’ 퍼포먼스로 하여금 미술관과 노동관계에 있어서 위계적인 체계를 드러냈으며 공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이고 젠더화된 구분을 보여주었다.
미술의 장소는 미술이 놓이는 말 그대로의 공간으로부터 분화되기 시작했고, 특정한 입지를 지닌 물리적 조건은 장소 개념에서 기본 요소로 축소되었다. 장소의 탈물질화를 향한 이러한 움직임은 미술작품의 탈심미화, 즉 시각적 즐거움을 제거하고 작품을 탈물질화하는 것과 동시에 진행된다. ‘작품’은 더 이상 명사/오브제가 아니라 동사/과정을 추구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관람 행위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대해 비판적인 예리함을 갖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반복될 수 없는 순간적인 상황으로 경험되는, 고정되지 않는 비영구적 관계임을 인식하도록 해 준다.
장소 특정성의 계보-2
오늘날 장소 지향적 작업의 지배적인 흐름은 바깥세상과 일상생활에 더 심도 있게 참여하고자 하였다. 지난 30년 동안의 장소 특정적 미술이 제도를 통해 미술의 문화적 한계를 비판하였다면 지금은 미술 밖의 이슈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문화비판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같은 확장된 참여 경향은, 심미적이고 미술사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고, 미술의 생산과 수용의 사회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심지어 엘리트주의적이라고 간주하면서 물리적, 지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인 미술의 범위 바깥에 있는 공공장소를 선호한다. 미술을 미술관 공간 및 시스템 밖으로 끌어내려는 시도는 공간적 확장에 덧붙여 광범위한 학문 영역에 까지 영향을 받고, 또한 패션, 음악, 광고, 영화, 텔레비전 등의 대중적인 담론에도 반응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장소 지향적 미술을 차별화하는 특성은 미술 작업이 장소로서의 한 위치의 실제성과 맺는 관계와, 장소로서의 제도적 틀이 갖는 사회적 조건과 맺는 관계 양쪽 모두가 지식의 영역, 지적인 교류, 혹은 문화적 논쟁 등과 같이 담론적으로 결정된 장소에 종속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마크 디온의 1991년 프로젝트 <열대 자연에 대해서>에서는 베네수앨라의 카라카스 외곽에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열대우림 지역에서 깃털, 버섯, 둥지, 돌뿐만 아니라 다양한 식물과 곤충의 표본들을 수집하여 살라 멘도사의 갤러리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나무상자에서 나와 그 자체로 마치 미술작품인 것처럼 전시된 표본들은 어떤 주제와 함께 그룹전을 통하여 전시 기획의 틀 안에 맥락화 된다. 또한 디온은 <열대 자연에 대해서>를 통하여 자연에 대한 문화적 재현과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그 밖에도 르네 그린, 실비아 콜보우스키, 그룹 매터리얼, 안드레아 프레이저, 그리고 크리스찬 필립 뮐러를 포함한 미술가들은 장소 특정적 미술 작업 자체를 하나의 ‘장소’로 보고, 그 같은 제반 양상이 심미적 필요성, 제도적 요구, 사회경제적 파급력, 혹은 정치적 효과 등과 관련하여 어떤 영향력을 갖는가를 숙고했다. 이렇게 해서 상이한 문화적 논쟁, 이론적 개념, 사회적 쟁점, 정치문제, 반드시 미술제도일 필요가 없는 일반적인 제도적 틀을 포함하여 지역 행사나 계절 이벤트, 역사적 조건, 심지어 개별적인 욕망의 형성조차도 장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제임스 마이어는 최근 장소 지향적 실천에서의 이러한 추세를 ‘기능적 장소’라는 용어로 구분했다. 장소는 이제 공간적이라기보다는 텍스트적으로 구성되며, 그것의 모델은 지도가 아니라 여정, 즉 공간을 통과하는 이벤트와 행동의 단편적인 연속이 되었다.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미술실천에서는 장소는 물리적 근거가 있는 고정적이고 실제적인 입지로부터 유동적인 가상의 담론적 벡터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미술과 미술가들의 공공적 역할을 재정의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적 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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