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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슈타이얼은 독일 뮌헨(1966)에서 태어났으며 뉴미디어 아티스트, 수필가,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아트리뷰에서 선정한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베를린 대학에 제직중이다. 그녀의 저서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소제목인 미술관은 공장인가?를 읽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 요약 하였다. 내용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 전체를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미술관은 공장인가?
미술관은 공장이 내부에서 수행된 일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 것처럼 미술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들을 바깥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이는 미술관이 공공 공간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이 비가시성은 동시대 미술관이라는 공공 공간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영화적 작업을 동시대 미술관에 포함하는 것은 어떻게 이 그림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붙타는 시간의 연대기』(1968)는 신식민주의에 대항한 제3영화 선언으로, 상영시에 “모든 관람자는 비겁자이거나 배신자다”라는 현수막을 건다. 이는 감독과 관객, 작가와 제작자의 구분을 허물어 정치적 행동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영화는 더 이상 공장에서 상영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포드주의 공장은 대부분 사라졌을 뿐더러 영화관은 복합 상영관화되고 디지털화 되었으므로 영사나 음향이 조악한 화이트 큐브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 화이트 큐브의 공간은 또한 동시대적 생산의 온상이 되어 또 다른 방식의 공장이 되기도 한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Factory)는 ‘사회적 공장’을 향한 생산적 전환으로서 새로운 미술관의 본보기가 된다. 그것은 생산의 한 형식으로서, 공적, 사적 삶 그리고 지식 생산과 소통의 전 영역과 양상에 접근하고 침투한다. 오늘날 미술관이라는 공장에서는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설치, 구상, 목공사, 열람, 의논, 관리, 상승 가치에 대한 내기, 관계망 형성이 주기적으로 교차한다. 조너선 벨러가 “영화와 그 파생물(텔레비전, 인터넷 등)은 관람자가 노동하는 공장이다”라고 주장하듯 관람하기란 곧 노동하기가 된 것이다. 영화는 이제 미술관 공간을 공장으로 되돌린다. 하룬 파로키는 루이 뤼미에르가 만든 최초의 영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동시대의 다양한 영화적 버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재현하고 수집하고 설치하였다. 여러 개의 모니터에서 노동자들은 다양한 시대에서, 또 상이한 영화적 스타일로 공장에서 줄지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작품이 설치된 미술 공간으로 입장한다. 또 다른 공장으로 말이다.
전통적인 공장이 노동자를 구속하듯이, 영화관도 관람자를 구속하고 통제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집합하고 해산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들과 유사한 대중(mass)이다. 하지만, 미술관 밖으로 나오는 관람자들은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는 달리 다중(multitude)이다. 즉, 일관성이 없다. 전통적인 영화 작업이 응시를 집중시키고 단채널 작업인 반면, 다채널 설치 작품인 파로키의 작품은 공간 안에 퍼져 있고 오직 정신분산, 분리, 차이를 통해서야 연결되는 다중에게 말을 건다. 이는 공공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이라는 부분에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술관의 설치 공간에서 관객은 공간을 순회하면서 능동적으로 몽타주하고, 건너뛰고, 파편을 조합하면서 실질적으로 전시를 공동 큐레이팅 한다. 그러므로 영화적 설치 작품에서 일반적인 영화관의 관람객과는 달리 영화적 지속 시간 자체의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를 둘러싼 담론의 진정한 공유를 차단함으로써 공론장의 이상주의적 발현 대신 미술관은 도리어 공론장의 충족되지 않은 현실을 대표한다.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설치의 정치학』이라는 글에서 전통적인 전시 일반에서는 작가의 작품 제작과 큐레이터의 작품 수집 및 전시 사이의 노동 분업이 분명하고, 전시 공간은 작품들이 축적되고 이에 따라 관람자의 동선에 따른 순차적 배열이 구현되는 공허하고 중립적인, 공적 공간인 반면 설치미술의 공간은 “포함된 사물들의 선택이나 설치 공간 전체의 조직화를 동적으로 정당화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된 개별 작가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계획된다.” 또한 설치미술의 물리적 지지체는 “공간 그 자체”이며, 중립적인 공공 공간을 개별 예술 작품으로 변형시키고, 방문객이 이 공간을 예술 작품의 전체론적, 총체적 공간으로 경험하게끔 유도한다.“ 즉 설치작품은 전통적인 전시에서 공적 공간이었던 미술관을 예술가의 의지에 따라 사유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작가는 전시장 공공 영역의 주권적 창시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오늘날의 영화적 정치는 탈재현적이다. 영화적 정치는 군중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 군중을 접합한다. 제 11회 도큐멘타에서는 100일간의 전시 기간 동안 너무나 방대한 분량의 작업으로 관객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고 도출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주권적으로 응시하는 관람자의 활동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다양한 시퀀스의 조합으로 편집된 다수의 응시를 요청한다. 그것은 공통 노동의 산물 이라기보다는 생산성의 패러다임에 생긴 균열의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술관이라는 공장과 그곳의 영화적 정치는 이 다수의 주체를 호명하고 이 주체를 향한 열망을 동시에 활성화시키는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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